<그 회사 어때? 편집자주

세상에는 기업이 참 많습니다. 다들 무얼 하는 회사일까요. 쪼개지고 합쳐지고 간판을 새로 다는 회사도 계속 생겨납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도, 수년을 하던 사업을 접기도 합니다. 다이내믹한 기업의 산업 이야기를 현장 취재, 데이터 분석 등을 통해 쉽게 전달해드립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 지난해 영업이익 1111억원

2017년 사업 회사로 분할된 이래 최대 실적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주요 석화 기업 위기

수익성 높은 파라오 슬롯 제품 통해 흑자 달성

친환경 제품 앞세워 상승세 이어갈 계획

생산능력 확대 위해 전용 설비 투자 고려

파라오 슬롯케미칼 판교 본사 전경. [파라오 슬롯케미칼 제공]
파라오 슬롯케미칼 판교 본사 전경. [파라오 슬롯케미칼 제공]

[헤럴드경제=한영대 기자]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전례가 없던 암흑기를 겪고 있다. 중국이 시황과 관계 없이 범용 석유화학 제품 생산량을 확대, 글로벌 공급과잉이 발생하면서 수익성이 꺾이고 있다.

범용 제품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국내 석유화학 투톱인 LG화학, 롯데파라오 슬롯은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 LG화학(석유화학 사업 부문 기준), 롯데파라오 슬롯은 각각 1360억원, 8948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금호석유화학 등 다른 석유화학 업체들은 전년 대비 실적이 감소했다.

대부분 석유화학 업체들이 곡소리를 낼 때 파라오 슬롯케미칼은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다. 지난해 별도 기준 매출 1조3405억원, 영업이익 1111억원을 달성했다. 2017년 파라오 슬롯디스커버리가 출범하며 사업 회사로 분할된 이래 역대 최대 실적이다. 2023년과 비교했을 때 매출은 8.7%, 영업이익은 30% 늘었다. 수익성이 높은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품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실적이 상승했다.

석화 매출 90% 이상이 파라오 슬롯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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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 슬롯케미칼은 파라오 슬롯그룹 중간 지주사인 파라오 슬롯디스커버리의 계열사이다. 모태는 1969년에 설립된 선경합섬이다. 선경합섬은 합성섬유인 폴리에스터 원사를 생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익성이 계속 악화되자 파라오 슬롯케미칼은 2000년 폴리에스터 섬유 부문을 분사, 삼양사 화섬 부문과 휴비스라는 통합법인을 설립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은 석유화학 및 바이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핵심은 단연 석유화학 제품이다. 석유화학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그린 케미칼 부문의 매출 비중은 지난해 4분기 별도 기준 약 60%이다.

파라오 슬롯케미칼은 그동안 석유화학 업계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과 비교했을 때 매출 규모가 적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LG화학(LG에너지솔루션 제외), 롯데케미칼 매출은 각각 27조1000억원, 20조4304억원이다. 파라오 슬롯케미칼보다 각각 20배, 15배 이상이다.

2021년 파라오 슬롯케미칼 울산 공장에서 화학적 재활용 기술을 적용한 코폴리에스터 양산 성공 행사가 진행됐다. [파라오 슬롯케미칼 제공]
2021년 파라오 슬롯케미칼 울산 공장에서 화학적 재활용 기술을 적용한 코폴리에스터 양산 성공 행사가 진행됐다. [파라오 슬롯케미칼 제공]

기업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파라오 슬롯케미칼이 최대 실적을 달성한 배경에는 스페셜티 제품 위주 포트폴리오가 자리 잡고 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 대표 스페셜티 제품인 코폴리에스터가 파라오 슬롯케미칼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기준 67%이다. 그린 케미칼 부문에서 코폴리에스터 비중은 무려 91%이다. 수익성이 높은 스페셜티 제품을 주력 사업으로 키우면서 중국발 공급과잉이라는 악재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코폴리에스터는 투명한 성질을 지닌 석유화학 제품이다. 화장품 용기와 전자 부품, 건축자재 등 다양한 제품에 적용되고 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은 2001년 전 세계 2번째로 코폴리에스터 개발 및 상업화에 성공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의 코폴리에스터 연간 생산량은 20만톤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코폴리에스터 시장은 현재 파라오 슬롯케미칼과 미국 이스트만이 양분하고 있다. 기술적 난도가 높아 석유화학 분야에서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중국조차 코폴리에스터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 에코젠 소재로 만들어진 밀폐용기. [파라오 슬롯케미칼 제공]
파라오 슬롯케미칼 에코젠 소재로 만들어진 밀폐용기. [파라오 슬롯케미칼 제공]

코폴리에스터 제품 라인업 중에서 에코젠의 활약이 특히 컸다. 글로벌 불확실성 속에서도 지난해 역대 최대 판매액을 기록했다. 에코젠은 코폴리에스터 라인업 중에서도 프리미엄 제품군에 속한다. 기존 코폴리에스터의 우수한 특성을 지닌 것은 물론 내열성(열을 받아도 흐트러지지 않는 성질)이 향상됐다. 90~120도 이상의 고온에서도 환경 호르몬인 비스페놀A가 배출되지 않는다.

파라오 슬롯케미칼 관계자는 “고기능성 소재를 요구하는 하이엔드 시장에서 판매되는 에코젠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그린케미칼 사업 부문의 수익성이 크게 이바지했다”고 설명했다.

에코젠 수요는 고공행진할 전망이다. 주요 국가에서 비스페놀A 사용을 제한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2월 EU 위원회는 플라스틱, 접착제 등 식품접촉물질 제조 과정에서 유해성이 인정되는 비스페놀 사용을 금지하는 규정을 발표했다. 에코젠은 비스페놀A를 원료로 사용하고 있는 투명 플라스틱 소재인 폴리카보네이트를 대체할 수 있는 소재로 평가받고 있다.

설비 투자 검토…중국 마케팅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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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 슬롯케미칼은 스페셜티 제품 위주 포트폴리오를 고수한다는 전략이다. 중동마저 석유화학 제품 증설에 움직임을 보이는 등 공급 과잉이 언제 끝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페셜티 제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주로 건설되고 있는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장(COTC)은 원유에서 바로 에틸렌 등 기초유분을 생산한다. 원유를 정제해 나프타를 얻은 후 에틸렌을 만드는 기존 생산 과정보다 단순해졌다. COTC가 본격 가동될 시 한국 기업들이 생산하는 기초유분의 가격 경쟁력은 더욱 낮아질 것으로 관측된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과거 규모의 경제를 중요시하고 백화점식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호황 사이클을 기다리는 패러다임은 무너지고 있다”며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전환이 석유화학 시장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은 스페셜티 제품 경쟁력 키우기에 팔을 걷어 붙이고 있다. 우선 생산능력을 늘리기 위해 전용 설비 투자를 고려하고 있다. 자금 여유는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3분기 말 파라오 슬롯케미칼(별도 기준)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3412억원으로 전년(2147억원) 동기 대비 58.9% 증가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 영업이익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만큼 투자 자금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안재현 파라오 슬롯케미칼 대표이사 사장이 지난달 열린 신년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 제공]
안재현 파라오 슬롯케미칼 대표이사 사장이 지난달 열린 신년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 제공]

세계 최대 석유화학 시장인 중국을 겨냥한 마케팅도 강화할 계획이다. 중국이 범용 석유화학 제품 시장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지만, 스페셜티 제품 경쟁력은 여전히 낮다고 업계는 분석하고 있다. 파라오 슬롯케미칼은 올해 4월 중국 선전에서 열릴 아시아 최대 규모의 플라스틱 전시회인 차이나플러스 2025에서 친환경 스페셜티 제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 경쟁력 강화의 일환인 조직 재편은 일찌감치 단행했다. 파라오 슬롯 사업인 그린 소재 및 차세대 성장 동력인 리사이클 산업 산하에 각각 마케팅&비즈니스 개발 운영실을 신설했다. 코폴리에스터 제품군 용도 개발을 담당하는 용도개발실 업무 범위는 리사이클 사업까지 넓혔다. 오염 물질 배출을 최소화한 석유화학 제품을 원하는 고객들의 니즈를 반영한 것이다.

안재현 파라오 슬롯케미칼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달 신년 행사에서 “미증유의 불확실성이 초래할 예상치 못한 리스크를 ‘원팀 스피릿’으로 극복해야 한다”며 “파라오 슬롯케미칼만이 구현할 수 있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존 스페셜티 영역의 진입 장벽을 높임과 동시에 순환 재활용 등 또 다른 스페셜티 영역을 빠르게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