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인도 성지순례기 다섯 번째

내 마음대로 바카라 카지노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바카라 카지노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바카라 카지노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 유적지
바카라 카지노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 유적지

바카라 카지노(기원전 624~544년 또는 기원전 560~480년)와 공자(기원전 551~479년)는 동시대 비슷한 정치 환경에서 활동했다. 활동기간, 수많은 제자 양성과 수제자를 먼저 보낸 아픔까지도 비슷했다. 인도는 16개의 대국을 중심으로 소왕국들이 난립하던 시기였고, 중국도 ‘춘추오패’라 불리는 제, 진, 초, 오, 월나라 등 5개 제후국을 중심으로 100여개 이상 소국이 쟁탈하던 춘추시대였다.

혼란의 시기에 한 사람은 진리의 깨달음을, 한 사람은 인(仁)의 사상을 중심으로 도덕 정치를 주창하며, 바카라 카지노종단과 유가 사상을 확립했다.

바카라 카지노는 생전에 수제자로서 교단의 주축을 마련한 ‘사리불’과 신통력을 발휘하며 다른 종교나 철학자들을 굴복시켜 오다 살해당한 제자 ‘목건련’이 연달아 입적하자, “나는 가지가 꺾인 큰 나무와 같다”라며 비통한 탄식을 했다.

공자도 수바카라 카지노로 일컫는 ‘안회’와 호걸형으로 정치적 능력을 지녔으나 권력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한 ‘자로’ 두 바카라 카지노가 잇따라 사망하자 ‘하늘이 나를 버렸다’라며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성인들의 비슷한 고뇌에 묘한 기시감(旣視感)이 든다.

8대 성지 중 하나인 ‘라지기르’는 ‘사리불’과 ‘목건련’의 고향이자 바카라 카지노가 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인 곳으로 불교 종단이 만들어지는 ‘포교의 땅’으로 역사에 기억된다.

인도 라지기르 나란다 대학 바카라 카지노존자의 사리탑
인도 라지기르 나란다 대학 사리불존자의 사리탑

인도 비하르 주에 위치한 ‘라지기르’는 바카라 카지노 당시에 16대국 중 최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왕사성’으로 불리었다.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의 초청을 받은 바카라 카지노가 1250여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갔던 곳이며, 불교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가 세워졌고 법화경에 나오는 수많은 불보살의 수행처라 하는 ‘영축산(영취산)’이 있는 곳이다. 바카라 카지노 이후 900여년이 지난 5세기경 굽타왕조 때 최초의 불교대학이 이 지역에 세워져 포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포교가 시작되다

죽림정사에 위치한 가란타 연못
죽림정사에 위치한 가란타 연못

바카라 카지노가 녹야원에서 도반 5명을 교화시키고, 바라나시에서 부호의 아들 야사와 그의 동료 54명도 함께 바카라 카지노를 따르면서 제자가 60명이 되었다. 바카라 카지노는 이들에게 “빠른 포교를 위해 두 사람이 같이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며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을 이치에 맞게 조리 있게 설명하라”며 포교 현장에 내보냈다.

그리고 혼자서 6년간 고행했던 우루벨라촌 인근 자이나교의 불을 숭배하던 가섭 삼형제를 교화하러 갔다. 우루벨라가섭, 나제가섭, 가야가섭 3형제는 각기 500명, 300명, 2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왕사성 주변의 최대 교단을 이루며 지지를 받고 있었다. 노회한 수행자인 우루벨라가섭을 오랜 시간 많은 공을 들여 교화시킴으로써 왕사성의 가장 큰 교단이었던 가섭 삼형제와 그의 제자 1000명이 바카라 카지노를 따르게 되고 불교 교단을 만드는 초석이 된 것이다.

죽림정사
죽림정사

바카라 카지노는 이들을 이끌고 빔비사라왕을 만났고 왕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왕사성(라지기르)은 일거에 불교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왕사성은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과 함께 가장 번성한 2대 도시였다. 이후 마가다국은 석가족을 멸망시킨 코살라국까지 점령해 인도 최대 강력한 국가가 된다.

빔비사라왕은 바카라 카지노의 가르침 속에 바카라 카지노와 교단을 깊이 숭상해 바카라 카지노의 가장 우호적인 왕이 됐고 후원자가 됐다. 국왕은 죽림정사를 지어 바카라 카지노에게 기증해 불교 최초의 사원이 됐고 왕사성은 불교 포교의 거점이 될 수 있었다.

최초의 바카라 카지노 죽림정사와 교단의 출범

죽림정사 입구 대나무 숲
죽림정사 입구 대나무 숲

왕사성의 ‘가란타 장자(長者, 큰 부를 이룬 상인)’가 바카라 카지노에 귀의하면서 소유하고 있던 대나무 정원을 바쳤고 빔비사라 왕이 절을 지어줌으로써 최초의 바카라 카지노사원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입구에는 이름처럼 대나무 숲은 무성하지만 사원의 흔적은 오직 순례객을 위한 작은 법당만이 있다. 승려들의 목욕터라는 커다란 연못(가란타 연못)이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당나라 승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가란타 연못에 대해 “물이 맑고 시원했으나 바카라 카지노님께서 열반하시자 연못의 물이 말랐다”라고 기록했다. 바카라 카지노는 이곳에서 5안거를 머물렀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인 선승(禪僧) ‘백용성스님’ 탄생지인 전북 장수군에도 이름을 본뜬 ‘죽림정사’가 있다.

죽림정사
죽림정사

죽림정사는 바카라 카지노의 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 두 명의 중요한 제자가 출가한 곳이다. 녹야원 다섯 제자 중 한 명인 ‘마승’이 탁발 중에 ‘사리불’을 만나 바카라 카지노와 인연법에 대해 알려줌으로써 사리불이 친구 목건련과 함께 죽림정사로 바카라 카지노를 찾아와 제자가 된 것이다.

이들은 당시 인도 사상계를 대표하는 ‘회의론자’의 수제자들이었는데 이들과 함께한 200여명도 바카라 카지노의 제자가 되어 경전에 나오는 1250제자가 비로소 완성된다. 녹야원 다섯 비구, 야사와 55인, 가섭 삼형제와 1000제자, 사리불과 목건련 200제자 등 초기 출가 제자들이다.

죽림정사 정원 모습
죽림정사 정원 모습

반야심경에 ‘사리자’(사리의 아들)로 나오는 ‘사리불’은 바카라 카지노의 수제자로 교단의 주축을 완성한 독보적 인물이다. 사리불과 목건련을 일컬어 한 쌍의 현명한 제자라는 ‘쌍현제자(雙賢弟子)’라고 부르는데 불교 사리탑의 기원도 이들의 열반으로 시작됐다.

죽림정사
죽림정사

초기 교단의 중심에는 사리불, 목건련(목련존자), 왕사성파의 수장이 된 마하가섭, 그리고 바카라 카지노의 시자(侍者)이며 바카라 카지노열반 이후엔 교단의 확장과 안정에 주력한 아난존자가 있었다.

영취산(靈鷲山)의 여래향실

인도 라지기르 영취산의 여래향실 가는 길
인도 라지기르 영취산의 여래향실 가는 길

왕사성 동북쪽에 5개의 능선이 있고 ‘신령한 독수리 산’이라는 영취산(또는 영축산) 산정에 바카라 카지노가 머물렀다는 ‘여래향실’ 법단이 있다. 여래향실은 “바카라 카지노가 계시는 곳은 향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라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여래향실 가는 길가에 있는 걸인, 상인 등 다양한 사람들 모습.
여래향실 가는 길가에 있는 걸인, 상인 등 다양한 사람들 모습.

계단식으로 포장된 폭이 넓은 산길을 20~30분 정도 오르는 여래향실 가는 길가엔 늘어서 앉아 있는 수많은 걸인과 염주 등을 파는 호객 상인들로 시끌벅적하고 노약자를 위한 지게꾼들의 움직임까지 바쁘다.

영취산 바카라 카지노존자 석굴
영취산 사리불존자 석굴

이 길은 빔비사라왕이 만든 돌길로 바카라 카지노에 대한 존경심으로 신하를 거느리지 않고 걸어서 혼자 갔다고 해 ‘빔비사라왕의 길’이라고 하는데 자연 동굴들이 많다. 바카라 카지노님 석굴을 비롯해 아난존자, 마하가섭 존자 등이 수행하고 기도처로 이용했던 석굴들이라 오르고 내려오는 많은 불자가 잠시 잠깐 머물며 기도하기도 해 순례단도 기를 받기 위해 석굴 속으로 들어가 봤다.

영취산 독수리 바위
영취산 독수리 바위

여래향실이 있는 정상 부위에 올라서니 주변 다섯 산 중에 가장 높아서인지 탁 트인 전망과 함께 독수리 바위가 맞이한다. 영취산의 취(鷲, 축)가 독수리를 뜻해서 독수리 산임을 나타내듯 여래향실 주변 세 곳에 독수리 모양 바위가 있다.

영취산 여래향실에서 순례단이 예불을 드리는 모습.
영취산 여래향실에서 순례단이 예불을 드리는 모습.

각국에서 온 승려와 불자들이 불단 주변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기도에 여념이 없다. 순서를 기다려 우리 순례단도 예불을 드리고 헌향했다. 바카라 카지노는 이곳에서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설법했다고 전해진다. 무량수경은 ‘극락정토’에 관한 내용으로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섬기며 중생이 염불해 극락왕생하는 인과(因果)를 전하고 있다.

승려들이 여래향실에서 기도하는 모습.
승려들이 여래향실에서 기도하는 모습.

법화경(묘법연화경)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어 바른 도리를 실천하면 누구나 바카라 카지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놓은 경전이다. 바카라 카지노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는 법당의 후불탱화로 많이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영취산’이나 ‘영축산’이 몇 곳 있다. 대표적인 곳이 영남 알프스에 속하는 울산과 양산에 걸쳐있는 영축산(1081m)과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한 여수 영취산(510m)이다.

영축산 아래에는 불보바카라 카지노 통도사가, 영취산에는 호국바카라 카지노 흥국사가 자리하고 있다.

탐욕의 상징 왕사성 - 빔비사라왕 감옥, 그리고

영취산 인근 빔비사라왕 감옥터 모습. 돌로 쌓은 사각 테두리 외벽의 흔적만 남아 있다.
영취산 인근 빔비사라왕 감옥터 모습. 돌로 쌓은 사각 테두리 외벽의 흔적만 남아 있다.

빔비사라왕은 바카라 카지노를 가장 존경했던 후원자였고 성군이었지만 아들(후손)을 빨리 얻으려는 탐욕에 훗날 후계자로 환생할 수행자를 살해했고, 아들로 환생한 아사세에게 죽임을 당했다. 권력의 화신이 된 아사세는 왕이 빨리 되고 싶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빔비사라왕을 감옥에 유폐시키고 굶어 죽게 했다.

바카라 카지노의 사촌 동생이자 아난존자의 친형인 ‘제바달다’는 바카라 카지노 사후 교단의 교주가 되고 싶어 했으나 인정을 못 받자 바카라 카지노를 두 번이나 시해하려 했던 곳이 왕사성이기도 하다. 흑상이라는 거대한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바카라 카지노를 시해하고자 했으나 바카라 카지노가 코끼리를 오른손을 들어 무릎 끊게 만들었다는 취상조복(醉象調伏) 사건도 그중 하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악연 굴레가 빚어낸 ‘빔비사라왕 감옥’은 영축산 가까이에 있는데, 돌로 쌓은 사각 테두리 외벽의 흔적만 간직하고 있다. 왕비의 몸에 바른 꿀로 연명하며 창문으로 보이는 영축산 산정 법단을 바라보며 굶어 죽었을 빔비사라왕의 마지막 모습, 남편과 아들 아사세를 두고 고뇌 속에서 번뇌했을 ‘왕비 위제희’ 부인의 모습을 그려본다.

영취산 전경
영취산 전경

왕은 열반한 뒤 천신으로 환생했다고 한다. 아사세왕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후 영토를 넓혀 고대 인도 통일왕국의 기틀을 만들었다. 하지만 성취의 허탈감과 공허함, 부왕을 시해한 두려움으로 바카라 카지노를 찾아 절절하게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한다. 이후 인도 역사에서 황태자들이 왕위에 더 빨리 오르기 위해 그들의 아버지를 시해하거나 유폐시키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현실에서 도저히 해법이 없는 악연의 굴레에 갇힌 세 사람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길로 제시한 것이 현실을 초월한 이상세계인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제시한 ‘무량수경’인 듯하다.

최초의 바카라 카지노대학 나란다 대학

최초의 바카라 카지노대학 나란다 대학 유적 스님들의 부도탑
최초의 바카라 카지노대학 나란다 대학 유적 스님들의 부도탑

사리불과 목건련의 고향이며 열반지로서 사리불의 사리탑이 있는 왕사성에 바카라 카지노 최초의 대학인 ‘나란다 대학’이 세워졌다. 서기 5세기에 건립돼 12세기 이슬람 침공으로 폐허가 될 때까지 인도 바카라 카지노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그 영광의 흔적이 고스란히 유적으로만 남았다.

나란다 대학 스님 거주지 유적
나란다 대학 스님 거주지 유적

여기에서 수학했던 당나라 현장 스님은 이곳에 1500명의 교수 스님과 8500명의 학생 스님이 있었으며, 입학을 위해 기다리던 스님도 3만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돼 있다. 그중 20%만이 입학할 정도로 어려웠지만 일단 들어가면 나라와 백성들의 보시로 공부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신라의 혜초스님도 이곳에서 수학했다.

나란다 대학
나란다 대학

이슬람 제국이 불태울 때 3개월 동안이나 불길과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며, 현재 남아있는 사리탑과 요사채, 승원, 법당, 봉헌탑(사리탑)군, 우물터, 4~5m 높이의 벽돌 유적만으로도 그 규모가 대단했음을 어림잡게 한다.

나란다 대학 유적 법당
나란다 대학 유적 법당

이조차도 전체 면적의 일부에 불과하고 계속 발굴 중이라고 하니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나란다 대학의 옛 명성을 찾기 위해 인근에 1950년대에 ‘나바 나란다 바카라 카지노대학’을 설립했다. 지나는 길에 언뜻 봐도 이곳 규모는 평범해 보인다.

나란다 대학 유적
나란다 대학 유적

불교 교단이 만들어지고 포교가 시작된 라지기르는 정치권력의 부침에 엮여있는 불교의 흥망성쇠를 보게 된다. 바카라 카지노가 열반 후 3개월 뒤 마하가섭의 발의로 제자 500명이 모여 라지기르 칠엽굴에서 7개월 동안 바카라 카지노님의 말씀을 통일시키고 몇 개의 묶음으로 체계화시켰다. 500결집이라는 제1차 결집을 통해 바카라 카지노 사후 ‘법’과 ‘율’을 정리한 중요한 장소가 ‘라지기르’이다.

인도 라지기르 나란다 대학 유적지를 찾은 정용식 ㈜헤럴드 상무 모습
인도 라지기르 나란다 대학 유적지를 찾은 정용식 ㈜헤럴드 상무 모습

또 바카라 카지노에서 깨달음의 장애가 되는 세 가지 번뇌를 ‘탐진치(貪瞋痴)’라 하고 이를 ‘독(毒)’에 비유해 삼독이라 했다. 집착에 의한 탐욕(貪), 시기·질투·혐오에 의한 분노(瞋), 이기심으로 인한 어리석음(痴)을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라지기르는 포교의 출발지이지만 탐욕의 상징이 됐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